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문단 편집) == 절정 == [include(틀:제노사이드)] 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가 우세했다. 그러나 화력과 장비에서 열세인 데다 파키스탄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하여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전으로 파키스탄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군은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동파키스탄인들에게 총탄을 퍼부었으며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하고[* 특히 다카 대학교에서 일어난 학살이 유명하다.]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많은 농민들을 죽였다. 파키스탄은 초반에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비록 동벵골 탄압에 대해서는 큰 비판을 받았으나, 기본적으로 동벵골 독립에 전세계적으로 대부분 부정적으로 반응했다는 이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에서 고민 끝에 파키스탄을 제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벵골의 현지 미국 외교관들은 파키스탄군의 살육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본국에 강력한 개입을 요청했지만 당시 대통령 [[닉슨]]과 국무장관 [[키신저]]는 이미 게임이 끝났다고 보고 불필요한 개입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키스탄 측은 이러한 국제적 지지를 제손으로 박살내는데, 파키스탄군의 살육행각으로 인해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1,000만 명의 벵골인 난민들이 인도로 도망치게 된다. 인도 입장에서도 더 이상 이 사태를 좌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파키스탄과 사이가 나빴고, 자기들끼리 내전을 치르는 동안 국력도 약해질 것을 기대했지만, 어쨌든 자국 접경지역에서 쌈박질을 하고 있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당시 인도 국방 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600만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출신 피난민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차라리 단기간에 파키스탄을 공격하여 종전시키는 비용이 싸게 먹힌다고 할 지경이었다. 인구는 많은데 경제력이 좋지도 않던 인도 사정에 동파키스탄 피난민들은 큰 부담이었다. 게다가 이 동파키스탄에서 온 피난민들은 대부분 힌두교도들이라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쫓아냈다간 학살당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에 섣불리 쫓아낼 수도 없었다. 실제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물론 무슬림들도 엄청나게 학살당했지만 학살의 주 타깃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힌두교도들이었다. 당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이 동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을 선동해 독립을 획책했다고 여겨 대대적으로 힌두교도들을 학살했고, 결국 수많은 힌두교도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도 땅으로 피난을 갔다. 한편 이러한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에 당황한 파키스탄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고자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대적 폭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군의 인도 국경 폭격은 오히려 분노한 인도의 직접 개입을 초래하게 된다. 이전까지는 앙숙 파키스탄을 골탕먹이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키고 묵티바히니에 무기 및 보급 지원, 인도 영토 내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는 정도였지만 국경지역이 폭격당하자 자국에 대한 무력 사용으로 간주한 인도는 입장을 급선회한다.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해도 기죽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